2류 국가, 2류 인재

들어가며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으로 1998년 경원대 교수를 지낸, 문재인 정권에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지낸 홍종학 교수님이 IMF 구제금융기를 막 벗어나려던 2001년에 '한국은 망한다'라는 저서를 내셨습니다.

저는 이 책을 대입 논술을 잘 쓰기 위한 목적에서 2001년 말에 읽었는데,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각종 문제에 대해 고교생 수준의 매우 조잡한 지식만 갖고 있던 제게 쉽게 와 닿지 않는 충격적인 저서였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좀 더 제게 강하게 와 닿은 것은 실제 한국 사회의 온갖 조잡함을 온 몸으로 겪고 있던 2020년 무렵이었습니다.

한국에서 2008년에 학부 졸업하자마자 모 외국계 증권사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가,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영국, 미국을 거치며 석, 박 공부를 하고 창업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귀국을 했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인이 투자 받기도 쉽지 않았고 (온갖 사건이 다 있었습니다...), 어차피 한국에서 저렴하게 개발자 뽑아서 사업하는게 더 비용이 적게 들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018년에 한국에서 창업했는데, 2~3년간 한국 사회의 작동 구조, 벤처투자사(VC)들의 이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한국 인력들의 역량에 충격을 먹으면서 저 책의 비판을 좀 더 강도높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전 이제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망할 겁니다.

아래에 기술하겠지만, 우리와 똑같은 스타일의 문화를 갖춘 중국이 우리보다 더 큰 내수 시장, 더 강력한 글로벌 영향력, 그리고 더 저렴한 노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따라잡히는 건 시간 문제라고 그랬었습니다만, 이제는 많은 부분에서 따라잡힌 상황이고, 아마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는 시점에는 우리가 추격자가 된 산업이 한 두 군데가 아닐 겁니다.

삼수를 해서라도 서울대를 가라? 집안 돈을 끌어넣어서라도 해외 명문대를 가라

홍 교수님이 연세대 출신으로 느낀 한국 사회의 학벌 중심 문화에 대한 비판만 제 글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 홍 교수님이 욕하시는 그 대학교를 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히려 전 S대라고 해서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제 글의 곳곳에서 그런 내용들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영국 LSE로 석사를 갈 때만해도 2군 대학으로 유학 간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많이 꺾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도 미국으로 Finance로 박사 갈려면 제일 좋은 옵션 그룹 (중 가장 안 좋다는 평가가 있기는 해도) 중 하나라고 하니까, 미국의 몇몇 옵션들을 포기하고 갔었습니다. 속으로는 여기서 1등 하겠지라고 생각 했었습니다. 그런데, 입학 전에 열어준 수학&통계학 Boot camp 시험을 칠 때부터 벌써 충격을 먹었습니다. 저는 100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시험장을 나왔는데 최소 커트라인인 50점을 겨우 넘는 점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1년 간의 석사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이 말하는 'Economic intuition'이 학부 시절에 류근관 교수님이 말씀하신 '통계학적 직관'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었고, 학부 1년 후배가 미국 로스쿨로 유학 가기 전에 저희 학교 대학원에서 일부러 류 교수님 대학원 통계학 수업을 꼭 듣고 가라고 충고해줬던 이유도 공감이 됐습니다.

그 전까진 저도 '테크 트리'를 쌓는다는 개념으로 수학, 통계학을 배웠는데, 이름만 수학이 안 달린 수업이지, 사실상 모든 내용이 수학인 수업들을 들으면서 사실은 수학이 언어고, 그 언어로 대화하는데, 풀어내는 문제가 누군가는 경제학이고, 또 누군가는 기상학이고, 또 누군가는 데이터 과학이라는 걸 석사 과정 후반에서야 겨우 깨닫게 됐습니다.

아이러니컬한 부분은, 그 학교 학부 과정 기말고사 문제들을 구해서 풀다가 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겁니다. 왜 석사 가 놓고 학부 과정 문제를 구해서 풀었나? 석사 과정 시험 문제를 아무리 잘 풀었다 싶어도 60점을 받기가 힘들어서, 도대체 얘네들은 어떻게 학부 때 공부하길래 70점, 80점짜리 답안지를 뽑아낼 수 있나 궁금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학부 시험 문제가 수학적인 난이도만 낮았지, 논리적인 난이도는 석사 과정 문제들과 별 다른 게 없었습니다.

너무 충격을 먹어서 영국 고교생들이 좋은 대학교를 갈려고 친다는 A레벨 시험을 봤는데, 역시 수학적인 난이도가 더 내려갔을 뿐, 논리적인 난이도는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이미 고교 시절부터 그렇게 논리적으로 꽉 찬, 영어 표현으로 Air-tight argument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렀던 애들보다 수학 실력이 개미 눈물만큼 더 좋았을 뿐, 논리력은 형편 없었기 때문에 60점을 받기가 쉽지 않았던 걸 깨달았습니다.

외국 나가면 동북아시아 애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SNU를 모릅니다. 박사 입학하고 지도 교수님이

BTW, where did you do your undergrad? Seoul, what National? OK. Asian national universities should be good, I guess

이런 표현만 쓰고 넘어가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에서야 SNU라는 학벌이 먹어주고, 연세대 출신이신 분이 평생에 한이 되셨는지 '삼수를 해서라도 서울대를 가라'고 표현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위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집안의 돈을 다 쓸어넣어서라도 해외 명문대를 가라'고 표현을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미국 명문대 어디를 나왔다고 하면 다들 천재라고 바라봐주는 게 부러워서일까요? 아닙니다. 위에 쓴대로 저는 석사 1년간 손가락이 부릅트도록 답안지를 수백번 고쳐써도 60점을 받기 힘든 시험 문제, 기출문제랑 구조가 같아서 문제가 예상이 되는대도 불구하고 점수를 올릴 수가 없는 문제, 난 논리력이 없다는 것을 팩트 폭격으로 때려주는 시험 문제를 풀었던 암울한 기억 때문입니다.

제 자식은, 당신들의 자식은, 자라나는 한국의 미래가 어린 시절부터 사고력을 기르는 훈련을 받지, 수능 시험 점수 잘 받는 기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한국 교육을 경멸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살면서 한번도 학벌 때문에 질투가 나거나, 부끄러운 일은 없었습니다. 학벌이 아니라 친구들의 능력이 부러운 적은 많았습니다. (이런 천성으로 타고나서 복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학부 시절 친구들은 직장에서

이 XX 서울대 나온거 맞아?

라는 표현을 들은 이야기를 심심찮게 합니다. 외부의 편견과 달리, 거꾸로 서울대라는 이름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거겠죠. 그 이름에 맞는 역량을 못 갖췄으니까요.

근데, 도대체 서울대 출신이 갖춰야 하는 역량이 뭘까요?

고작 수능 시험이라는 '암기 역량 + IQ 테스트'에서 남들보다 좀 더 좋은 점수를 받은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왜 동경대 출신들이 노벨상을 받는 동안 서울대 출신들은 노벨상을 못 받느냐?

위의 퀴즈 중 그래프 문제는 일본 동경대학교 1996년 입시 기출문제입니다.

수학적 직관이 있는 인재를 뽑고 싶은 동경대 교수들의 욕심이 잘 드러나는 시험 문제인데, 한국이 이런 식으로라도 인재를 뽑았으면 상황이 조금은 달랐지 않았을까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위에 쓴 대로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서 내 시야가 정말로 좁았구나는 깨달음을 뒤늦게 얻었습니다.

한국이 학력고사, 수능, 고시 등으로 이어지는 조잡한 암기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고 있기 때문에 1류 국가를 이끌 인재를 키우는 건 불가능하겠구나는 깨달음을 얻게 됐었습니다.

책을 쓰게 된 계기

한국의 AI산업, 데이터 과학 산업이 단순히 지식만 많으면 된다, 딥러닝만 잘 돌리면 된다, 프로덕션에 쓰는 코드만 많이 갖고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암기식, 수능식, 한국 학원식으로 시장이 돌아가는 걸 보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시장을 '정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스위스까지 가서 대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설립한 '스위스AI대학(Swiss Institute of Artificial Intelligence, SIAI)'로 한국 학생 70여명을 가르쳐봤고, 대략 15명 남짓을 졸업시켜 주는 상황이 됐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우려했던대로 '사고력', '논리력'을 체화시키지 못해 논문을 못 쓰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안타깝습니다만, 이게 한국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1년 만에 그런 역량을 기르기 쉽지 않았고, 다른 한국인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 책은 그런 한국의 3류 교육이 만들어 낸 비극적인 현실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담아냈습니다.

홍종학 교수님의 책 덕분에 제가 충격을 먹고 눈을 떴듯이, 그래서 스위스까지 가서 AI대학을 만들었던 것처럼,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조금이라도 깨어나서 한국의 망하는 수레바퀴를 멈춰 세우기를 바랍니다.